린가오현에는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건물 바로 옆에 위안소가 있었고, 원창시에는 현재 중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 안에 위안소 흔적이 남아 있다.
석록광산 노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광산 내 기업위안소가 있었는데 그곳에도 다수의 조선인 여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해군의 요충지
하이난도(海南島)는 중국 광서성(廣西省)의 남쪽 끝 레이저우(雷州)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비교적 커다란 섬이다. 동쪽으론 필리핀, 서쪽으론 베트남 북부와 가까워서 1930년대 말 남진을 위한 군사 요충지로서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했다. 일본군이 점령한 1939년부터 1945년 패전까지 6년간 하이난은 전장이었다. 국공내전의 영향으로 섬 각지에 공산군과 국민당 군대가 주둔하였고, 중국인의 저항을 두려워한 일본군은 섬 여러 지역에서 방화와 주민 학살을 자행했다. 하이난 내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 곳곳에 위안소가 설치되었으며 그 중 광산 개발을 위해 진출한 타이완척식주식회사 노동자들을 위한 위안소도 있었다고 한다.
전쟁 피해
유년기에 전쟁을 경험한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이 마을의 비교적 좋은 집들을 몰수하여 위안소로 운영했다고 한다. 위안소의 관리는 일본군의 허가를 받은 하이난도 방언이 가능한 중국인이 직접 하였다. 하이난도 주둔 시 위안소를 방문한 조선 출신의 해군 징병인은 위안소 출입 시 2원의 이용료를 냈다고 증언했다. 또한 광산 노동자들이 위안소를 이용하는 걸 보았다는 증언과 일본군이 하이난도 마을 여성들을 강제로 군부대 안으로 끌고 가 ‘위안부’로 삼았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위안부’뿐만 아니라 하이난 주민들도 전쟁 피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섬 안에 세운 설탕공장과 비행장 건설에 하이난 도민들을 동원했고, 광둥 지역에서부터 동원되어 강제 노동을 겪다가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난의 위안소
하이난도 위안소에서 사세보(佐世保)를 거쳐 귀환한 김옥주의 생애는 식민지 조선 여성이 인신매매를 통해 위안소로 넘어간 경로를 그대로 보여준다. 대구 출신인 김옥주는 인천의 한 가정에서 식모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믿고 고향을 떠났다. 결국 하이커우(海口)시 장제로(長提路) 에비스 위안소에 있다가 1946년 9월에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와 당시 주민, 기록 등에 의하면 하이난도 여러 곳에 위안소로 사용된 건물들이 남아 있다. 린가오현(臨高현)에는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건물 바로 옆에 위안소가 있었고, 원창시(文昌시)에는 현재 중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 안에 위안소 흔적이 남아 있다. 일본질소주식회사가 개발한 하이난 서북부 창강현(昌江현)에 위치한 석록광산(石碌鑛山)은 다수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노역에 시달렸던 곳이다. 석록광산 노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광산 내 기업위안소가 있었는데 그곳에도 다수의 조선인 여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이난도 원창시 위안소의 흔적